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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광명의 역사에 대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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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의 역사

7월 2째주 화요일 학예사 양철운 선생님과의 귀한 지역역사공부시간
1년 과정인 환경해설 중급반 과정 수업이다
환경해설에 왠 역사공부냐 하지만
환경에는 그 지역의 자연, 역사, 사회, 정치 등등 모든 것을 통합하여야
하는 포괄적인 학문이다.

수업시작 서두에 선생님은 “광명에서 태어나신 분 계세요?”  .........
“10년 이상 되신 분은요?”, ......
광명에서 역사 강의를 하러 다니다 보면 대부분 이런 현상이라신다
정주의식이 없고 대부분 10년 안팎으로 사시는 분들이 그제서야 광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셔서 공부도 하시고 그러신단다.
하긴 저도 어쩌다 광명으로 들어온 지 벌써 9년이 되었네요
어느 지역에서 살던 마찬가지겠지만
교통과 교육, 환경 이런 것들만 신경 쓰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에 까지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많이 겸손하게 생기신분이(ㅋㅋ)
2시간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광명의 역사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광명은
서독산, 가학산, 구름산, 도덕산의 산림축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안양천이, 서쪽으로는 목감천이 감싸고 있다.
예전엔 시흥의 조그만 마을이였다고 한다.
기록이 없던 선사시대에는 유물들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빠른 광명의 성장 속에
남아있는 것들이 없다. 다만 가학동은 개발이 덜 되어 지석묘가 많이 발견되었다
광명의 지석묘는 작은 편이다. 강화도의 지석묘는 2,000명 정도가 올려야하는 크기지만
광명은 40~50명이 올릴 수 있는 수준의 것이고 또 집터가 발견되어 사람이 살았을 것이고 물도 근처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1. 삼국시대의 광명지역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는 측면에서 한강유역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대두되어 이 지역이 일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금강유역으로 밀려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차지했다.  
  광명시 지역과 관련된 기록이 이때 처음 등장하는데 고구려에 의한 “잉벌노현”의 설
  치.    仍(잉)-아기수태 伐(벌)-넓은들판 奴(노)-넓다 (넓고 풍성, 광활한느낌)
  광명지역이 잉벌노현의 일부가 되어 역사에 등장.

2. 통일신기시대
  삼국 통일 후 신라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잉벌노현을 대신하여 “곡양현” 시기  
  穀(곡)-곡식, 壤(양)-들판 (곡식이 있는 넓은 들판)
  최근 주목할 점은 안양천 너머 동편에 위치한 금천구 호암산성과 안양천의 역할에
  대한 점이다. 호암산성 정상의 우물지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발견되어 잉벌노라는 명칭을 재확인해 주었으며 호암산성은 신라와
당나라 전생이 임진강과 한강을 경계로 전개될 때 서해안의 해안지대를 지어주는
요충지 역할을 했을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
호암산은 안양천을 사이에 두고 도덕산과 마주 보이는 산으로 도덕산 보루는 이
시기에도 남아 주요 교통로인 안양천으로 올라오는 적을 공격하는 진지로 사용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안양천이라는 대천을 통해 한강 하류로 연결되는
교통상 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문헌, 유적, 유물 발견되지 않아서...

3. 고려시대 금주로서의 광명
  고구려의 잉벌노현 → 삼국통일 후 곡양으로 개명하여 율진군(지금의 과천)이
  거느리는  현이 되었고 고려초에 새이름을 얻게 되었다.  “금주”- (지역이 크다)
  특이한 것은 금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인 금천 강씨의 시조인 강궁진과 강감찬의
  존재다.
강궁진(강감찬의 아버지)은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정에 기여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다.
공을 세운 강궁진의 가문이 호족 세력으로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감찬의 출생지인 낙성대는 금주의 영역이던 관악구에 있고, 광명의 노온사동
능말 지역은 예로부터 금천 강씨의 주거지여서 금천 강씨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조선시대 금천, 시흥으로서의 광명
  건국초기 금주는 “금천”으로 개칭되었다.
  세조때 금천과 과천이 병합되어 금과현이 되고 치소를 금천에 두었다.
  그러나 치소의 위치 문제로 인해 양쪽 주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서 치소를 과천으로
  옮겼으나 불편함이  커져 다시 금천과 과천으로 분리되었다.
  실제로 광명을 포함한 금천 지역과 과천 지역은 거리로는 가까우나 관악산과
  청계산이라는 높은 산이 가로막혀 왕래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로 약 300년간은 행정구역 및 지명에 대한 논의 없이 변화가 없었다.
  조선전기에는 태종때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왕이 사냥을 즐겼으며 금천 아랫들까지
  행차 하여 유숙했던 기록이 있고 금천에서 사냥을 하다가 귀경길에 폭풍우를 만나
  한강을 건너 지 못했다는 기사로 보아 이 지역은 왕실의 여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조의 등장과 함께 금천지역은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하고 거의 1년에 한 차례씩
  능행을 다녔다. 이 과정에서 화성을 새로이 축조하고 수원부를 옮겨옴으로 능행로의
  변동과 고을의 위상도 변화를 맞게 되었다. 정조는 과천로로서 서울의 동작진에서
  남태령을 넘어 과천으로 나와서 청계산 앞을 빠져 사근천(현재 의왕시)을 통해 현릉원
  을 참배하였으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서울의 노량진에서 금천을 거쳐 안양을 지나 사근천에서 과천로와 합쳐져 지지대고개
  를 넘어 수원에 이르는 길 금천로.
  능행로가 과천로에서 금천로로 바뀜에 따라 종래 왕이 머물던 과천행궁을 대신하여
  시흥행궁(금천구 시흥동)이 새로이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금천현은 처음부터 크게 흥한 곳 “시흥”으로 정조가 지어주었다

  동면 - 상도, 봉천, 사당동
  북면 - 영등포, 당산동, 대방동
  서면 - 광명, 안양 박당동 일부
  남면 - 안양, 의왕시, 군포 의 큰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금천 지방에서는 채광위치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전기부터 은의 채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후 고종에 단행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명지역은 인천부 시흥군으로 편재된다

  일제시대 때 인근 안산, 과천이 흡수되어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
  해방이후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의 2개 법정리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서면 광명출장
  소가 설치되었다.

  1970년대에 서울시 영등포구와 시흥군간의 토지구획정리사업과 직강공사사업의 결과
  로 광명리의 일부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되고 영등포구의 일부지역이 시흥군에 편입되
  면서 오늘날과 거의 비슷한 경계선이 확정되었다.
  이후 광명의 변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고 서면 지역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다.
  도시화와 인구증가로 인해 시흥군 관내의 여러 지역이 읍이나 출장소로 승격해 가기  
  시작했고 드디어 1981년 7월 1일 시흥군 소하읍과 광명 출장소가 합쳐져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이로써 광명시는 하나의 새로운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탄생되었다.

  이후 광명시장과 철산중앙시장이 개설되었고 광명사거리에 주공아파트가 처음 생겼는
  데 경기도 최초의 아파트 단지(현 한진아파트)다.
  또 안양천이 폭우로 범람하여 철산리가 물에 잠긴 사건도 있었고
  1964년부터 조성된 구로공단으로 인해 안양천 건너편의 광명지역은 싼 주거비와 물가
  로 노동자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 되었고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해방이후부터 1981년 개청까지의 광명은 독자적인 계획에 따른 성장보다는 서울의
  성장에 동반하여 변화하는 역할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90면대 중반부터 역새권 개발, 첨단음악산업단지 조성, 가학동 폐광산 개  
  발,  광명돔경륜장 유치등 쾌적한 자연환경, 편리한 교통 등의 장점을 살려 시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광명지역 이름의 유래

  원광명(괭메)
- 광명7동 새터말과 노온사동 가락골 사이에 위치한 마을.
    광명의 뜻은 “검밝다”란는 고어에서 나온 것으로 검=왕, 밝은 임금이라는 의미
    원음인 괭메는 굉장한 또는 넓은 산이란 뜻


  철산동(쇠머리)
- 마을의 지세가 소의 머리 같이 생겼다 하여 소머리 → 쇠머리 → 쇠멀이라고 하였고
   쇠 → 철로, 멀 →이 으로 불려지게 되어 “철산”이 되었다
   철산12단지 뒤에 있는 산과 광명성애병원이 각 각 소의 뿔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안동 - 하평리와 안현리가 합쳐서 하안동

  소하동 - 치소(사또)가 다스리던 아랫마을

  일직동 - 임금의 호위를 위해 일직을 스러 나갔던 마을

  가학동 - 학이 둘러치고 있는 마을

  노온사동 - 민가는 없었고 노온사라는 절만 있었다 하여 노온사동

  이렇게 하여 2시간의 수업은 끝났다.
  광명의 지난 역사를 사진으로 보며 공부하니 현재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소중한지.
  지난 역사를 바라보니 재미도 있었지만
  언제나 떠날 생각을 하며
  지금도 기회만 엿보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수업내용을 정리한다고 했는데
  제대로 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광명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기회는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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